맛있는 요리/먹고 마시는 것들의 역사

생선회에 대한 고정관념

율이파더 2021. 3. 14. 14:53
SMALL

생선회에 대한 고정관념

 

<삼국지>를 보면 진등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서주의 하비 출신으로, 별 볼일 없는 사람이던 유비에게 서주를 넘겨준 도겸의 밑에 있던 책사이다.
유비가 서주를 맡은 지 얼마 안 되어 <삼국지>를 통틀어 최강의 무력과 용맹을 자랑하는 여포가 서주로 온다. 유비는 그를 성대하게 환영하지만, 무용에 비해 형편없는 것이 여포의 의리다. 상대방의 약점만 보면 바로 배신하는 여포는 얼마 안 가 유비를 쫓아내고 서주를 손에 넣어버린다. 이때 진등은 유비를 따라가지 못하고, 여포의 곁에 남는다.
생선회 이야기를 하면서 왠 삼국지에 나오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해 하는 분들도 계실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가 오늘의 주제인 생선회와 관련이 있다. 생선회가 일본에서 비롯된 음식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공자가 활동했던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중국에서는 육류나 생선을 불에 익히지 않고, 얇게 저며 식초로 양념한 회가 널리 퍼져 있었다. 공자 자신도 회를 무척 좋아해서 “생선회나 육회는 얇게 썰어 먹을수록 소화가 잘 된다.” 고 노래할 정도였다. 이탈리아에도 생선살을 소스나 기름에 버무려 먹는 회가 있는데, 주로 참치 살을 올리브기름에 버무려 먹는다고 한다.
양저우는 화이허와는 가깝지만 황혜와는 제법 거리가 멀어서 바닷고시보다는 민물고기들을 조리한 요리가 많았다. 중국에서 인기 있는 음식 재료로 쓰이는 민물고기들은 농어나 잉어인데, 양저우에서도 그런 생선들로 만든 회가 많았다.

진등은 생선회를 무척 즐겨 먹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는 증세로 점점 몸이 나빠졌다. 속이 답답해 음식을 먹어도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았다. 얼굴이 붉어지고 뱃속도 더부룩해서 마치 몸속에 돌맹이라도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지등은 당시 중국 전역에 이름을 날리던 명의인 화타를 불러 진찰을 부탁했다. 화타는 진등의 눈과 혀 등을 살펴보고는 자신의 비법대로 약을 지어 주었다. 그 약을 먹은 진등은 구역질이 나 요란하게 토악질을 했는데, 놀랍게도 대가리가 붉은 꿈틀거리는 벌레가 잔뜩 나왔다. <삼국지>에 따르면 그 양이 작은 항아리 세 개에 담아도 될 정도였다고 한다. 당황한 진등에게 화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태수께서는 평소에 익히지 않은 음식들을 드십니까?”
“그렇습니다. 특히 화이허에서 잡히는 물고기들로 만든 회를 좋아합니다.”
“저런. 그래서 태수께서 이런 병에 걸리신 겁니다. 모든 고기나 생선의 몸속에는 저렇게 작은 벌레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대로 먹으면 저 벌레들이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 기생하면서 양분을 빼앗아 먹고 몸을 나약하게 만들지요.”
“허면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태수님의 병은 너무 오래 진전되어 나을 가망이 없습니다. 앞으로 3년 후에 다시 저런 증세가 재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몸을 더 오래 보존하고 싶으시면, 다시는 비린 생선을 드시지 마십시오. 소인이 드릴 말씀은 이게 전부입니다.”

화타의 말대로 진등은 3년 후에 병이 재발해 죽고 말았다. 화타의 충고에도 계속 생선회를 먹다가 기생충에 감염되어 죽게 된 것은 아닐까.



송나라 중기에도 회 요리는 있었다. 송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소동파도 생선회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송나라 이후부터 회를 먹는 풍습이 사라졌다. 임진왜란 때 파병 온 명나라 군사들은 조선인이 소나 생선의 살을 날로 먹는 모습을 보면 “구역질이 난다.”며 놀렸다.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도 “중국인은 반드시 고기를 익혀 먹으며. 결코 날로 먹지 않는다.” 고 기록할 정도 였다.
송나라 이후 갑자기 중국에서 생선회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까닭이 있겠지만, 조리법의 변화가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나라 이전까지는 대부분 음식들을 찜통에 넣고 찌거나 물에 오랫동안 삶아서 조리했다. 그런데 송나라 중기부터 석탄이 채굴되면서 사회곳곳에 보급되었고, 주방에도 석탄이 쓰였다. 석탄은 나무나 숯보다 훨씬 화력이 셌다. 그래서 강렬한 불로 굽거나 튀기는 조리법이 듣장했다. 그 바람에 자연스레 생선 요리도 회보다는 구이나 튀김 쪽으로 옮겨간 것이다.
양쯔강 하류 등의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생선회가 남아 있다. 하지만 생선의 살을 날로 먹는 것이 아니라, 살짝 끓이거나 식초에 담가두었다. 먹는 방식이어서 한국이나 일본의 생선회와는 전혀 다른 요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언제생선회가 등장했을까? 14세기 말, 무로마치 막부 때에 처음 나타났다. 그 이전까지는 일본에서도 생선은 끓이거나 찌는 방식으로 조리했다. 기계식 그물을 사용하는 어획방식과 생선을 오랫동안 신선하게 보관하는 냉동 기술이 등장하는 현대 이전까지, 일본에서 생선회는 왕족이나 귀족들이 먹는 고급 음식이었다. 생선 초밥도 생선회를 쉽게 먹을 수 없는 서민들을 위해서 생선 살을 조금씩 발라내 밥 위에 얹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과 유럽인들은 생선회를 가리켜 “살아 있는 살을 그대로 먹는 비위생적인 음식” 이라며 도리질을 했다. 1980년대 말 국내에서 방송된 어느 미국 TV 드라마에서는 미국인 대학생이 일본계 이민자의 집에 초대되어 놀러가는 장면이 나온다. 생선회를 실컷 먹은 그 청년은 뒤늦게 그것이 날 생선이었던 걸 알고는 기겁해 화장실로 달려간다. 그리고는 변기를 부여잡고 토악질을 한다. 그러던 미국인들이 이제는 서투르게나마 젓가락직을 배워가며 생선회를 먹는 데 여념이 없으니, 문화의 높고 낮음이 영구불변은 아닌가 보다.




LIST